'영화 감상'에 해당되는 글 2건
- 2012.05.22 [건축학개론] 우리에게 첫 사랑이 필요한 순간
- 2011.03.09 [만추] 기억에 사로잡힌 여자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남자의 만남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로 나오는 과거 씬은 승민의 감정씬이고, 승민이 바라보는 서연의 모습들이다.
과거 사랑하면서 얼마나 슬펐는가, 아팠는가, 서툴렀는가에 대해서 영화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야기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축학개론을 첫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아련한 첫사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시간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카피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다' 는 것이다. 즉, 영화는 승민의 서툰 첫사랑이 아닌 서연이 현실에서 찾고자하는 첫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 첫사랑이 있다' 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는 다른 맥락이다. 영화는 단순히 첫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첫사랑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피아노를 전공하지만 학원 출신이라 무시당하고, 제주도에서 올라와 서울의 화려함을 동경하는 양서연. 그녀는 전공인 피아노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하고, 어떻게든 그럴싸해보이는 강남에 입성하기 위해 애쓴다. 서연에게 있어 선배 오빠는 그 시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기보단 그가 보여주는 표식들이 서연에겐 필요했을 것이다. 멋진 차, 강남, 오피스텔, 건축과(90년대엔 매우 잘나갔다), 잘생긴 외모 같은 게 서연에겐 동경이었다. 그 선배오빠를 잡는다는 건, 서연에겐 그 오빠로 상징되는 것들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변두리 음대생에게 그건 큰 위미였을 거다. 그래서 좋아했을 거다. 아니, 그래서 좋아한다고 착각했을 거다.
15년이 지난 양서연의 모습은 20살 때 그녀가 몸부림치며 갖고 싶어했던 것들을 가지고는 있으나 '속은 텅 비어버린' 상태다. 매운탕처럼, 그저 맵기만 한, 속은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인생. 돈도 있고, 외모도 있고, 남들이 보기엔 그럴싸하고 근사하지만 속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태껏 무엇을 바라며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저 돈이 필요해 남편과 별거를 하며 시간을 벌었고, 그 대가로 거액의 위자료를 챙긴 이혼녀일 뿐이다.
길고 긴 별거와 이혼소송 끝에 돈은 가졌으나 매운탕처럼, 이름도 없이 속이 텅 비어버린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너는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여자야' 라는 자기 긍정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제발 꺼져달라' 고 한 첫사랑 승민을 찾아간다. 그 첫사랑의 기억이, 아마도 그녀에겐 가장 대가없이 애정을 주고받은 유일한 기억이었을 테니까.
우리모두에게 첫사랑은 그러하다. 스펙이나 배경같은 것을 계산하지 않고 가장 순수하게, 가장 애틋하게, 가장 속 없이 내 모든 것을 꺼내놓고, 부끄럼없이 뭔가를 재지 않고 내 모든 것을 상대에게 준 순간이다. 상대의 눈길 하나에 초조해하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해석을 덧붙이면서 좋아서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순수하게 누군가를 오롯이 좋아한 적이 없어서 그 사랑이 깨어지고 나면 다시 사랑하기가 어렵다. 그때 그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줘서 그 뒤에 하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이보다 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자신없어서 첫 사랑이 깨어지면 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사라진 것 같아 서럽고 억울하다.
서연에게 승민이 그랬을 거다. 가장 대가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가장 순수한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 그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가장 예뻤던 시절을 다시 추억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시 확인받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그 기운으로 새롭게, 다시 살아가고 싶었으리라.
과거 가장 좋았던 추억을 되새김질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서연은 승민을 찾는다. 승민과 나누었던 과거를 그녀는 떠올리고 싶어한다. 그 기억으로 그녀는, 다시 기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승민은 반대다. 사랑받은 기억 없는 승민은 서연의 제스추어를 끝까지 거부한다. 승민은 끝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하고, 모든 것을 모른 체 한다. 승민에게 서연과의 기억은 배신당한 상처일 뿐, 추억하고 싶은 애틋함이 아니다. 한없이 사랑을 줬으나 사랑받은 기억은 없는 승민은, 서연이 내민 손을 못본 척 한다.
승민은 새 집을 짓자고 하지만, 그녀는 헌 집을 리모델링 하기를 원한다. 그녀가 살아온 흔적이 스며있는 어떤 기억들을 그녀는 하나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서연의 제주도 집은 다 망가졌으나 서연의 방은 마치 어제까지 쓰던 것 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서연은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돌아나온다. 추억은 그런 것이다. 망가뜨리거나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없는 것. 그것은 그저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다. 그 추억이 켜켜이 쌓여서 현재의 내가 있는 거니까.
서연의 집을 지으면서 승민은 본의 아니게, 낡고 바스라진 서연의 과거들은 털어내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순간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 추억들이 서연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꽤 큰 힘이 될 거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을까. 결국 건축학개론 과거 회상씬에서 서연의 감정보다 승민의 감정이 더 길고 자세하게 나와야 했던 이유는 승민이 그런 감정을 한때 품었다는 사실이, '서연' 에게 있어 살아가는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무게로 나를 저렇게 애닳게 좋아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과거 기억을 애써 모른 체 하던 승민 역시 서연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비로소 길고 지난했던 과거의 기억과 화해한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냐며 괴롭게 화를 내던 승민은, 서연이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하는 순간 외면하던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다. 그것으로 과거 승민의 기억은 다시 만들어진다. 이제 승민에게 서연은 '쌍년' 이 아닌 첫사랑의 기억이다.
건축학개론은 첫 사랑 영화다. 허나 사랑했던 '내 감정' 을 확인하는 영화가 아니라 날 사랑해주었던 '타인의 감정' 을 확인하는 영화다. 나도 한때 누군가에겐 저렇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받는 영화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주는 영화다.
과거는 털어내야 하는가,와 과거는 껴안아야 하는가, 를 사람들은 논쟁 한다. 과거는 털어낼 것도 껴안을 것도 없다. 과거는, 현재다. 그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고,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가끔 현재가 많이 꼬이고, 힘들면 우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를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뒤진다. 그것보단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귀한 존재였나' 를 다시 확인하는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건축학개론은 '양서연' 이란 여자가 무너지고 바스라진 현실의 삶을 리모델링 해 튼튼한 새 집을 짓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과거,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예뻤던 추억을 찾아 되살려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그녀는 앞으로 행복하게 씩씩하게 리셋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사랑한 순간, 이 아닌 사랑받은 순간, 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보는 내내 행복하고 아련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 더 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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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미련스러운 여자다. 그래서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저당잡히는 인물이다. 어린시절 첫사랑의 추억 때문에 그녀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돌아온 첫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 추억들은 그녀의 전부이다. 그랬기에 그녀의 남편은 의부증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고 있지 않는 아내, 언제나 과거 속에 살면서 추억만을 되새김질 하는 여자는 결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 애나의 남편도 나름대로 굉장히 괴롭지 않았을까.
영화의 첫장면에서 애나는 살인을 저지른 뒤 도망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것저것 흔적을 치우면서 그녀는 첫사랑 사진을 먹는다. 사진을 씹어 삼키려 애쓰는 그녀의 뭔가가 극도로 결핍되어 허기져 보이는 모습이었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과거에 있고, 현재에는 없는 것들이니 현실 생활에서 만족을 얻을 수도 행복을 구할 수도 없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사진을 씹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애정을 고파하는지 얼마나 충족하지 못한 욕구를 가슴 가득 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7년간 복욕하고 특박을 나온 직후 그녀의 모습 또한 7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 대신 감자칩을 아삭아삭 씹는 그녀는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교도소 입소 전 사진을 먹는 모습과 교도소에서 이를 닦는 모습, 그리고 나온 직후 감자칩을 먹는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그녀가 여전히 구강기적인 애착상태에 머물로 있는 불안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감독의 의도가 좋았다. 그녀가 얼마나 미련하고 아이같은지, 그녀의 정서가 얼마나 불안정하며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는지 그 짧은 몇 장면으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의 앞에 훈이 나타난다. 훈은 그녀와 정 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과거에 연연하지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애정이나 인연에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인물이다. 과거에 얽매여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자 앞에 현재의 인연조차 부정하며 조롱하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 애나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훈을 거부한다. 그녀는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게, 다시 누군가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게 하고 그 추억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안다. 자신이 얼마나 미련스러운지도 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가 주는 시계도 받고 싶지 않다. 추억이 무서운 그녀는 새로운 인물이 반갑지가 않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만 여전히 변함이 없고, 자신만 여전히 어린시절의 추억에 집착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애나는 과거의 기억을 버리기 위해 애쓴다. 훈에게 자자고 제의하는 것도 그러한 탈출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뒤 자책하는 애나에게 훈은 말한다. 'It's not your fault',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애나의 눈빛은 흔들린다. 애나가 정말 듣고 싶었던 그리고 애나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은 네 탓이 아니야. 네가 미련해서도 네가 둔해서도 아니야. 그 기억 속에서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위로들. 누구도 애나에게 해준 적 없어 애나 혼자 속으로 삭혀야 했던 이야기들, 곪아 들어가 결국은 애나를 갉아먹고야 말았던 상처들, 그것들을 훈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치료해준다. 그것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라고.
애나에게 그렇게 말해준 남자는 없었다. 첫사랑도, 남편도 모두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훈은 그러지 않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애나의 눈동자가 그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훈이 애나의 이름을 알기 위해 데려간 식당에서 애나는 훈의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할 뿐 음식을 먹지 않는다. 불안하고 신경질적으로 감자칩을 먹거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커피를 마시던 모습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둘은 같이 관광을 하고 다른 커플을 보며 모르는 척 각자 자기의 속마음을 말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애나는 훈에게 자신이 특박을 나온 죄수라고 말한다. '나쁘군요' 라고 훈은 말한다. 굳이 애나에게 중국어 말까지 물어서. 위로해 주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을 말한다. '나쁘군요' 라고. 그런 훈에게 애나는 중국어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두 사람은 소통하지 않는 것 처럼 소통한다. 두 사람은 소통되지 않는 방법으로 소통한다. 애나는 중국어로 말하고 훈은 애나의 말이 끝날 때 마다 분위기를 살피며 '나쁘군요' '좋군요' 를 제 멋대로 내뱉는다. 애나는 훈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훈은 애나가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과 달리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안다. 자신을 찾지도 않고, 기다려 주지도 않는 애나를 이제 훈이 먼저 찾기 시작한다.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지만 그 여자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그 여자들을 기억도 추억도 하지 않는 훈에게 애나는 최초로 기억되는 여자이다. 자신에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찾고 싶은 여자이다. 그래서 훈은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애나의 첫 사랑을 만난다.
애나는 훈에게 중국어로 과거를 털어놓았기에 훈은 그 남자가 애나의 첫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 남자가 애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가 애나에게 좋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그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는 애나의 상처를 정확하게 집어낸다.
'그가 내 포크를 허락없이 썼어!'
단 한 번도 제가 원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여자, 자기가 갖고 있던 것 까지도 제 멋대로 상대에 의해 난도질 당해야 했던 여자, 그래서 맘 껏 울지도 서러워하지도 못하고 그 나쁜 남자에게 화 한 번 내지 못한 여자가 그 말에 처음으로 엉엉 운다. 그것은 나쁘다고 왜 그랬냐고 하면서 운다. 그녀가 원한 건 '포크' 처럼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나 그녀의 인생에선 주어지지 않았다. 그 결핍을 충족시키지 못해 그녀는 미련스러워졌고, 그 미련스러움이 그녀의 인생을 갉아 먹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훈은 달래주고 위로해준 것이다.
씨애틀로 떠나기 전 훈은 애나에게 시계를 주고 싶어한다. 이제 훈은 기억과 추억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사내가 애나를 통해서 그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애나는 거절한다. 그녀는 두렵다. 이제 겨우 조금 가벼워졌는데 또 다시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갖는 것이 겁이 난다. 훈과의 관계를 여기까지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혼자 버스에 오른다.
빈 그녀의 옆 자리에 다시 훈이 앉는다. 그는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인사한다. 결국 그녀는 그 인사를 받는다.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두 사람은 새로운 공간에 두 사람의 새로운 추억을 넣는다.
안개때문에 버스가 멈춘 사이, 훈은 자신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사건이 터졌음을 알게된다. 어쩌면 그것은 방종의 대가였다. 가볍게, 지극히 가볍게 살고 싶었던 남자는 조금 무거워지려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흔드는 일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 사실을 안 뒤 곧장 애나에게 가 열정적으로 키스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다시 만날까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알았을까.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는 게 훈에게 어떤 의미인지. 게다가 다시는 누군가도 못 만날 수도 있는 지금 훈의 상황에서 애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게 어떤 의미인지 애나는 알아챘을까. 어렵게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냉정하게 내칠 만큼 누군가와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남자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막연한 미래를 희망하게 된 것이다. 미래가 사라진 현실에서.
영화 마지막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애나는 두 사람이 헤어졌던 그 곳을 다시 찾아간다. 어쩌면 그 모습은 여전히 미련스러워보인다. 하지만 영화 초반과 달리 애나의 모습에서 불안한 정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앞에 놓인 케이크를 먹지도 않는다. 그녀는 다만 바깥을 바라보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정말로 믿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훈이 다시 올 거라고. 아마도 제법 오랫동안 애나는 훈을 그 곳에서 기다리지 않을까.
기억과 추억은 사람을 살게 하기도 하고 죽게 하기도 한다. 탕웨이는 인터뷰에서 여러번 훈을 애나에게 있어 꿈같은 남자라고, 너무나 아름다운 상대라고 표현했다. 애나는 추억 속에 사로잡혀 인생을 저당잡힌 여자였다. 훈은 순애보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애나에게 있어 'only one' 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애나가 가진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제게 가져온 남자였다. 그래서 무겁고 우울한 애나를 웃게 했다. 그녀에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만추. 가득찬 가을. 과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겨울의 초입에서 모든 것을 떨어뜨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제목과 같은 영화였다. 가득 차 있기도 하고 텅 비어 있기도 한, 가을의 끝자락 같은 영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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