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절반가까이 온 일지매를 본 현재까지의 느낌은 지독한 비극의 주인공과 신화적인 영웅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현재 비극의 주인공은 비극에서 벗어나려 애를 쓸 수록 점점 늪으로 빠지고 있는 형상이고, 영웅은 자신만의 리그에 갇혀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고 성장할 수 있을까. 또한 이 드라마는 팩션이라는 한계를 과연 얼마만큼 극복할까.
오이디푸스와 꼭 닮은 시후
초반에 일지매를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 이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연 순간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간 캐릭터는 '시후' 이다. 일지매에 비해서 분량은 적은 편이지만 작가가 꽤 공을 들여서 이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시후를 통해서 가장 비극적이라 일컬어지는 오이디푸스를 재현하고 있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운명의 덫에 걸리는 오이디푸스처럼 시후의 인생이 그러하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일 자식이라는 신탁에 의해 버려지고, 시후는 종년이 가진 아이라고 어머니와 함께 버려진다. 의붓 부모 밑에서 잘 자란 오이디푸스는 청년시절 자신의 신탁을 듣게 되고, 자신이 친 아버지라 믿는 의붓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의붓 부모 곁을 난다. 하지만 여행의 과정에서 그는 신탁대로 자신의 친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의붓 아버지를 친 아버지라 믿고 자란 시후 역시, 의붓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친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다. 친 어머니와 부부의 연을 맺음으로써 치명적인 죄를 짓는 오이디푸스처럼 시후 또한 누이를 고변하여 누이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후에 이것은 시후를 가장 정서적으로 옥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이디푸스가 '신탁' 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쓸수록 더욱 더 그 운명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결국 가장 비극적인 주인공이 된 것 처럼, 시후 역시 '신분적 한계' 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쓸수록 그는 점점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앞으로 그는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지매를 잡는데 혈안이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게 될 것이다. 상대에게 창을 내밀면 내밀수록 더 깊숙하게 자신에게 창이 꽂히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오이디푸스처럼 눈을 찌를지, 아니면 그러한 비극을 극복해내고 일지매와는 또 다른 영웅으로 탄생할지, 그의 선택이 기대된다.
일지매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
일지매는 전형적인 영웅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그는 왕족으로 태어났고(고귀한 자제), 영특하다.(비범한 능력) 어린시절 역적의 자식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위기1) 도망쳐서 용이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난다.(위기 극복)
앞으로 그가 본격적인 일지매가 된 뒤 다시 위험이 찾아올 것이고(위기2), 그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한 뒤 그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을 찾고 승리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일지매에게서 영웅의 구조 외에 다른 부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일지매가 가진 태생적 한계이다. 홍길동처럼 얼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처지에 깊이있는 성찰을 하고, 사회 개혁에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지매는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위치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의 명예이다. 주몽신화처럼, 애초에 고귀한 신분이었던 사람이 일시적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신분을 찾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서민과 깊이 공감하기 보다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는데 더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 잃어버린 것만 되찾게 된다면 그것으로 사건은 모두 해결된다. 홍길동처럼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거나, 다른 서민층에서 일어난 의적들이 그러한 것 처럼 체제 전복을 굳이 꿈꿀 필요가 없는 것이 일지매이다. 일지매의 아버지 또한 권력 싸움의 희생자이지, 그가 백성들을 위해 행동하다가 죽은 게 아니므로 일지매가 찾는 것 또한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일지매의 싸움은 양반들끼리의 싸움, 즉 그들만의 리그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왕과 양반들의 권력 다툼에 따라서 일지매의 향방이 결정된다.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드물지만) 만약에 왕이 자신의 과거를 지극히 반성하고, 근처의 간신배를 숙청하고 겸이 집안을 다시 원위치 시켜준다면 일지매의 이야기는 끝난다. 이것이 바로, 손에 가진 것을 놓친 기득권적 영웅의 한계이다. 애초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되찾는 이야기이기에 결국 가진 자들의 싸움에 불과하다.
일지매는 8회에서 '내 일 외엔 관심없다' 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바로 현재의 일지매를 나타낸다. 남은 회 동안 일지매가 풀어야 할 숙제는 어떻게 하면 '그들만의 리그' 에 모든 민중을 참여시키냐의 문제이다. 일지매가 도적이 된 까닭은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지 홍길동처럼 민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에서 시작한 일이 과연 민중을 향할 수 있을까? 수 많은 민중들을 모두 일지매가 품을 수 있을까?
일지매가 진정한 민중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들의 편에 서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현재 일지매 본인에게 주어진 자신의 일이 너무 커 보인다. 과연 일지매는 이 큰 자신의 사건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편에 서는 '의적' 이 될 수 있을지 앞으로 진행될 일지매의 성장이 기대된다.
동화적인 상상력과 역사적 현실 사이
일지매라는 인물은 분명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그가 사는 곳은 분명 엄연히 존재했던 역사적 현실 한 가운데이다. 드라마 '일지매' 는 역사적 현실 한 가운데 비현실적인 일지매를 둬 팩션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시청자들의 몰입을 극대화 시켰다. 초반에는 이 설정이 일지매라는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영웅에 현실성을 주입하는 데 큰 도움을 줬으며, 이야기의 얼개를 짜임새 있게 했다. 하지만 일지매가 성장하고, 점점 영웅이 되어갈 수록 이 설정은 일지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꽉 짜여진 현실 속에 너무나 비현실적인 영웅이 들어갔다. 그 영웅은 성장하는데 역사적 현실은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 영웅은 '아기장수 설화' 처럼 날개가 잘려 죽음에 이르진 않을까? 과연 제작진은 자신들이 만든 영웅을 얼마나 성장시킬 것이며, 짜여진 현실 속에서 얼마만큼의 일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힌 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세력을 되찾아 기득권 안에 편입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영웅 또한 제 한 몸 잘 살기 위해 또 다시 백성들의 희망을 잠시 농락한 그렇고 그런 놈에 불과하지 않은가.
팩션은 영웅을 이야기 하기엔 적절한 구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팩션을 선택했다면 분명 그러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이야기 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제작진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드라마에서 잘 표현되어 극이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두 캐릭터가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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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줄도 모르고 있었던 일지매 리뷰인데 뒤늦게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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