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우리에게 첫 사랑이 필요한 순간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로 나오는 과거 씬은 승민의 감정씬이고, 승민이 바라보는 서연의 모습들이다.
과거 사랑하면서 얼마나 슬펐는가, 아팠는가, 서툴렀는가에 대해서 영화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야기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축학개론을 첫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아련한 첫사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시간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카피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다' 는 것이다. 즉, 영화는 승민의 서툰 첫사랑이 아닌 서연이 현실에서 찾고자하는 첫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 첫사랑이 있다' 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는 다른 맥락이다. 영화는 단순히 첫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첫사랑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피아노를 전공하지만 학원 출신이라 무시당하고, 제주도에서 올라와 서울의 화려함을 동경하는 양서연. 그녀는 전공인 피아노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하고, 어떻게든 그럴싸해보이는 강남에 입성하기 위해 애쓴다. 서연에게 있어 선배 오빠는 그 시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기보단 그가 보여주는 표식들이 서연에겐 필요했을 것이다. 멋진 차, 강남, 오피스텔, 건축과(90년대엔 매우 잘나갔다), 잘생긴 외모 같은 게 서연에겐 동경이었다. 그 선배오빠를 잡는다는 건, 서연에겐 그 오빠로 상징되는 것들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변두리 음대생에게 그건 큰 위미였을 거다. 그래서 좋아했을 거다. 아니, 그래서 좋아한다고 착각했을 거다.
15년이 지난 양서연의 모습은 20살 때 그녀가 몸부림치며 갖고 싶어했던 것들을 가지고는 있으나 '속은 텅 비어버린' 상태다. 매운탕처럼, 그저 맵기만 한, 속은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인생. 돈도 있고, 외모도 있고, 남들이 보기엔 그럴싸하고 근사하지만 속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태껏 무엇을 바라며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저 돈이 필요해 남편과 별거를 하며 시간을 벌었고, 그 대가로 거액의 위자료를 챙긴 이혼녀일 뿐이다.
길고 긴 별거와 이혼소송 끝에 돈은 가졌으나 매운탕처럼, 이름도 없이 속이 텅 비어버린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너는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여자야' 라는 자기 긍정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제발 꺼져달라' 고 한 첫사랑 승민을 찾아간다. 그 첫사랑의 기억이, 아마도 그녀에겐 가장 대가없이 애정을 주고받은 유일한 기억이었을 테니까.
우리모두에게 첫사랑은 그러하다. 스펙이나 배경같은 것을 계산하지 않고 가장 순수하게, 가장 애틋하게, 가장 속 없이 내 모든 것을 꺼내놓고, 부끄럼없이 뭔가를 재지 않고 내 모든 것을 상대에게 준 순간이다. 상대의 눈길 하나에 초조해하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해석을 덧붙이면서 좋아서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순수하게 누군가를 오롯이 좋아한 적이 없어서 그 사랑이 깨어지고 나면 다시 사랑하기가 어렵다. 그때 그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줘서 그 뒤에 하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이보다 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자신없어서 첫 사랑이 깨어지면 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사라진 것 같아 서럽고 억울하다.
서연에게 승민이 그랬을 거다. 가장 대가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가장 순수한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 그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가장 예뻤던 시절을 다시 추억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시 확인받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그 기운으로 새롭게, 다시 살아가고 싶었으리라.
과거 가장 좋았던 추억을 되새김질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서연은 승민을 찾는다. 승민과 나누었던 과거를 그녀는 떠올리고 싶어한다. 그 기억으로 그녀는, 다시 기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승민은 반대다. 사랑받은 기억 없는 승민은 서연의 제스추어를 끝까지 거부한다. 승민은 끝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하고, 모든 것을 모른 체 한다. 승민에게 서연과의 기억은 배신당한 상처일 뿐, 추억하고 싶은 애틋함이 아니다. 한없이 사랑을 줬으나 사랑받은 기억은 없는 승민은, 서연이 내민 손을 못본 척 한다.
승민은 새 집을 짓자고 하지만, 그녀는 헌 집을 리모델링 하기를 원한다. 그녀가 살아온 흔적이 스며있는 어떤 기억들을 그녀는 하나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서연의 제주도 집은 다 망가졌으나 서연의 방은 마치 어제까지 쓰던 것 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서연은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돌아나온다. 추억은 그런 것이다. 망가뜨리거나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없는 것. 그것은 그저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다. 그 추억이 켜켜이 쌓여서 현재의 내가 있는 거니까.
서연의 집을 지으면서 승민은 본의 아니게, 낡고 바스라진 서연의 과거들은 털어내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순간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 추억들이 서연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꽤 큰 힘이 될 거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을까. 결국 건축학개론 과거 회상씬에서 서연의 감정보다 승민의 감정이 더 길고 자세하게 나와야 했던 이유는 승민이 그런 감정을 한때 품었다는 사실이, '서연' 에게 있어 살아가는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무게로 나를 저렇게 애닳게 좋아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과거 기억을 애써 모른 체 하던 승민 역시 서연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비로소 길고 지난했던 과거의 기억과 화해한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냐며 괴롭게 화를 내던 승민은, 서연이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하는 순간 외면하던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다. 그것으로 과거 승민의 기억은 다시 만들어진다. 이제 승민에게 서연은 '쌍년' 이 아닌 첫사랑의 기억이다.
건축학개론은 첫 사랑 영화다. 허나 사랑했던 '내 감정' 을 확인하는 영화가 아니라 날 사랑해주었던 '타인의 감정' 을 확인하는 영화다. 나도 한때 누군가에겐 저렇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받는 영화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주는 영화다.
과거는 털어내야 하는가,와 과거는 껴안아야 하는가, 를 사람들은 논쟁 한다. 과거는 털어낼 것도 껴안을 것도 없다. 과거는, 현재다. 그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고,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가끔 현재가 많이 꼬이고, 힘들면 우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를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뒤진다. 그것보단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귀한 존재였나' 를 다시 확인하는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건축학개론은 '양서연' 이란 여자가 무너지고 바스라진 현실의 삶을 리모델링 해 튼튼한 새 집을 짓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과거,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예뻤던 추억을 찾아 되살려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그녀는 앞으로 행복하게 씩씩하게 리셋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사랑한 순간, 이 아닌 사랑받은 순간, 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보는 내내 행복하고 아련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 더 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