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남기고 싶은 이야기

[뿌리깊은 나무] 아들들의 뿌리찾기

귤이네 2011. 10. 28. 10:51



극의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웰메이드 사극이다. 정말 잘 쓴 글을 보면 저절로 리뷰가 떠오르는데 이 드라마가 현재 내게 그러하다. 인물 설정, 캐릭터들간의 대립각, 이야기의 인과관계 등 모든 게 아주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다.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뿌리깊은 나무' 를 만들기 위한 각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싸움에 대해 다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들이 뿌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가지가 될 것인지에 대해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타인의 선택에 대해 반발하며 대립각을 세운다.

세종은 스스로 뿌리가 되기를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이미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가 되길 강하게 부인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자신에게서 뻗어나갈 세계를 꿈꾼다. 아버지란 나무에서 뻗어나온 한 가지로 있을 때 스스로 내내 불행했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가지가 다 쳐내지는 것을 보며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깊이 고찰했던 이 사려깊은 인물은 상생을 위해 스스로가 뿌리가 되길 꿈꾼다. 자신에게서 뻗어나간 가지가 모두 다 잘 살기를 바라며 자신이 그 가지들에게 양분을 주는 뿌리가 되기를, 누구 하나 쳐내거나 누구 하나 죽이지 않고 모두 살리는 인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이도와 정 반대지점에 있는 캐릭터가 바로 채윤이다. 채윤은 아버지가 세상에 전부였던 인물이다. 이 지점에서 이도와 채윤의 구도가 흥미를 가진다. 이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아버지를 두었으나 그 아버지로 인해 불행했고, 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만을 꿈꾼다. 채윤의 아버지는 세상 모두가 반푼이라고 하는 인물이었으나 채윤은 그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행복했고, 아버지의 세상 속에서 살기를 바란 인물이다. 그러나 채윤의 그런 바람은 (채윤이 생각하기로는) 이도로 인해 부숴진다. 자신의 세상을 유지하고자 아무 죄책감 없이 타인의 세상을 부수는 것은 이방원의 특기였으나 정치적으로 무지한 채윤은 그것이 이도가 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도를 증오한다.

모두를 살리고 싶은 이도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도는 아버지의 그늘에 있고 싶으나 그 소망이 절망된 채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자신의 아버지가 한 일인데 자신의 일이 되었다. 게다가 채윤은 자신과 달리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아버지로 인해 괴로운 이도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채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아버지의 세상을 버리고 싶은 이도는 아버지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오해를 받고, 아버지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목숨을 내줘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렇듯 세상을 정 반대로 지각하고 있는 두 인물로 초기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중반 이후로 이 드라마는 여기에 '밀본' 의 '정기준' 이라는 인물을 투입하면서 긴장을 한층 고조시킨다.

단순히 이도-채윤의 갈등이라면 이도가 채윤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한글 창제를 하기만 하면 끝날 문제다. 이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오해이니 더 길게 끌고갈 만한 힘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밀본이 개입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밀본은 표면적으로는 채윤과 같이 아버지의 세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인물인 정기준이 이도에 대해 대립각을 세운 이야기이다. 정기준의 아버지는 이방원에 대립각을 세우다가 축출 당했다. 정기준은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며 이도가 만드는 세계를 위협하다. 여기에 이중적인 오해가 한 번 더 발생한다. 정기준의 세상과 이도의 세상은 동일했었다. 그래서 이도가 만들 세상엔 정기준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도는 정기준을 살리려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도의 세상은 변화한 반명 정기준의 세상은 변화하지 못했다. 이젠 정기준의 세상이 더 이방원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이도의 변화를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의 세상만을 옳다고 우길 뿐이다. 그것은 이도의 방식이 아니다. 이방원의 방식이다.

이도는 정기준이 이방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만든 세상이 다시 아버지에 의해 위협 받는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인물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 이도는 채윤과 오해를 풀 수 없다. 채윤에게 세상을 돌려주고 싶으나 그렇게 된다면 다시 밀본에 의해 채윤은 상처 받게 될 것이다.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채윤의 앞에 나설 수도 그게 오해라고 말해줄 수도 없다.

이도는 기득권이되 자신의 권리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밀본은 단지 왕의 기득권을 신하와만 나누길 바란다. 채윤은 기득권을 나누고 싶지 않은 기득권들에 의해 아버지를 잃는다. 이도의 방식은 채윤과 맞으나 채윤은 이도를 오해하고 있다. 밀본은 겉으로는 채윤과 목표가 같아 보이나 실상을 파고들면 채윤의 가치와 밀본의 가치는 전혀 다르다. 채윤은 겉으로는 아버지를 옹호하는 밀본측과 닿아 있으나 속내는 모두를 위한 세상을 꿈꾸는 이도와 닮아 있다.

이 셋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도 뿐이다. 그래서 이도는 여전히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채윤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건넬 수 없다. 다만 채윤이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자신 역시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간다면 채윤의 길 끝과 자신의 길 끝이 만나리라, 믿을 뿐이다. 그게 이도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다.

이제 이도는 모두에게 증명해야 한다.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아버지를 부수면서까지 세우고 싶은 자신의 '뿌리깊은' 나라가 정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 과연 그게 정말로 옳은가. 스스로에게 생겨나는 의문을 누구와 의논도 하지 못하는 이도는 그것을 혼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

뿌리깊은 나무는 아버지들의 세계를 둘러싼 아들들의 싸움이다. 아버지의 세계를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들의 세계를 이해할 것이며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아들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과연 어떤 방식이 옳은지, 그들의 충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나는 소망한다. 새로운 세상을 굼구는 이도의 세상이 옳기를, 우리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기를.
조만간 대선을 치룰 우리에게 이 드라마는 어쩌면 훌륭한 해법을 제시해줄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