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왕의남자

귤이네 2009. 11. 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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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남자 인물들에 대한 짧은 고찰 + 금붙이에 대한 나름 분석



빙점의 요오꼬는, 자신이 지금껏 믿어왔던 신념과 자신의 위치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순간 자살한다. 내게 왕의 남자는, 한순간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무너지고 뒤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내지르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녹수이다. 녹수는 영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자신의 역할이 무너지는 순간을 가장 민감하게 잡아내고, 그 역할을 되찾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중전보다도, 다른 그 어떤 궁녀보다도 그녀가 도도할 수 있었고,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부분은 그녀가 왕에게 어머니 대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왕에게 결핍된 모성애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왕에게 하대를 할 수 있었고, 마음껏 욕을 하고 패악을 부려도 그것이 인정되었다. 그 어떤 여자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었고, 그 어떤 여자보다 왕의 총애를 받았던 궁녀. 그러나 그녀는 공길이 나타나는 순간 무참히 그 위치에서 떨어져 버린다. 처음엔 그저 왕의 소꿉놀이 상대쯤이라 생각되던 공길이 경극을 하고 그 경극에서 왕이 ‘어머니’ 라 부르며 공길에게 달려나가는 순간 녹수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는다.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공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공길은 영화 속에서 백지이고, 여백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쉽게 공길에게 감정이입을 해버린다. 그렇기에 남자들에게 이 영화는 불편하고, 여자들에게 이 영화는 아련하다. 그러나 가장 백치같은 이 공길이 실은 가장 복잡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영악한 인물이다. 공길은 녹수 다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장생의 감정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장생 앞에서는 평소보다 더 약하고, 여리고, 순해진다. 놀이판에서는 그토록 눈을 빛내며 재기발랄하던 사내가, 위기에 처하면 그 누구보다 순발력 있게 대처하던 사내가 장생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물가에 내 놓은 아이가 되어버린다. 깨어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이불을 덮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장생의 감정을 장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산을 만나면서 자신이 계산에 넣지 못한 감정이, 욕망이 생긴다. 연산의 약한 모습을 보며 보호해주고 싶다는 욕망- 흔히들 모성애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이것을 공길이 가진 남성성이라고 보았다. 늘 남성적인 장생에게 보호받는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에 있던 공길이 연산의 약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장생처럼 누군가를 돌봐주고 싶다는 남성적인 욕망이 공길의 내부에서 깨어나게 된다. 새로운 욕망을 버릴 수도, 장생을 버리지도 못하는 그로 인해서 결국 장생은 눈을 잃게 되고 장생이 마지막 줄타기를 할 때 비로소 공길은 숨기고 숨겼던 자신의 마음을 토해낸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숨겨야만 장생을 옆에 둘 수 있었던 공길이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내지르는 마지막 순간이 내겐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길이 자신의 감정을 내지를 때의 연산의 처연한 표정 또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연산은 처음부터 자신의 위치나 역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순간도 안정적일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매 순간 불안했고, 그의 불안함을 없애주기 위해 처선은 광대패들을 궁에 들여서 왕권을 강화시키려 하지만, 연산이 공길에게 느끼는 동질감 때문에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단순히, 자신처럼 어머니의 결핍으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내지 못했던 공길과의 소꿉장난 같은 놀이에 연산은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경극을 계기로 연산은 공길에게서 녹수의 모습을 본다. 즉, 자신의 결핍된 모성애를 채워주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 공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공길을 통해서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와 불안정한 상태가 안정되길 바랬다. 그러나 공길의 자살시도를 통해 결국 공길은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녹수에게 돌아가지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녹수는 그를 더 이상 채워줄 수 없다. 즉,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자각, 녹수에의 회귀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놓아버린다. 마치 빙점에서 요오꼬가 자신이 불안정하다고 느낀 순간 자살을 택하는 것처럼.

이렇듯 세 인물은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장 모호한 공길조차도.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내지르지만, 실은 가장 어리숙한 인물은 장생이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잘못 인지 하고 있었고, 죽기 직전까지도 그러했다. 마지막에 공길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모른채로 죽었을 인물이다.

영화 초반 장생은 자신의 욕망을 아예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공길에게 큰 형 같은 듬직함으로 남고자 한다. 자신의 역할을 그것으로 한정지음으로써 자신이 공길에게 가지는 에로스적인 욕망은 차단해 버린다. 공길은 그것을 알고서 그런 장생의 감정을 어찌보면 이용하지만, 장생은 그런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자신이 공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자신은 공길을 탐하는 광대패나 양반들과는 다르다는 생각과 자신은 공길을 지켜줘야 한다는, 공길은 아이 같다는 그런 생각만을 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몸을 드러내어 놓고 자는 공길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장생의 모습에서 갈등이나 욕망을 읽어낼 수 없다. 그저 큰 형이 막내동생을 걱정하는 듯한 느낌만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공길이 연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장생은 당황한다. 공길이 연산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공길이 양반네들에게 살기 위해 몸을 파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장생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자신이 공길에게 가지는 욕망을 인정하면 자신의 위치를 버려야 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자면 그 욕망을 모른 체 해야 한다. 그 갈등은 결국 장생이 자신이 달았던 줄까지 끊으려고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결국 그는 공길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궁에 돌아온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의 마음까지도 아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서 장생은 여기서도 우를 범한다. 공길이 완전히 연산에게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라고 대들게 되고, 이미 공길과 장생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는 연산의 질투에 눈까지 잃게 된다. 눈을 잃고서 줄을 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장생은 연산을 ‘잡놈’ 이라고 표현하며 ‘잡놈이 그 놈 마음을 뺏어갔다’ 라고 울먹인다. 그러나 그 순간 공길이 ‘야 이 잡놈아’ 라고 장생을 부름으로써 장생의 위치를 찾아준다.

왕의남자에서 가장 많이 움직이는 인물은 장생이다. 장생은 영화내내 자신의 위치 찾기를 한다. 그리고 결국 온전하게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위치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살,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자리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왕의남자에서 가장 지금 말이 많은 게 바로 '금붙이' 에 대한 해석이다.
나는 그 금붙이가 장생의 성격을 대변함과 동시에 공길과 장생의 욕망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보았다.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마음이 가버린 공길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마음을 마음대로 지르고 눈이 지져진 자신의 처지를 과거 자신이 훔치지도 않은 금붙이를 훔쳤다고 말하고 매를 맞은 것과 비교해서 말한 것이라 보았다.

훔치지도 않은 금붙이.. 그리고 훔치지 못한 공길의 마음..
장생이 훔치지도 않은 금붙이를 훔쳤다고 주인은 생각해서 때렸고
훔치지도 못한 공길이의 마음을(적어도 장생이 생각하기에는)
연산은 훔쳤다고 생각하여 눈을 지지도록 명했다.

그런 장생의 독백을 공길은 명확하게 파악했고, 왕 앞에서 인형극을 할 때 자신이 금붙이를 훔쳤다고 말함으로써 장생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서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생의 마음을 알았기에 공길은 뒤에 장생이 연산을 '잡놈' 이라 일컬으며 울먹였을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장생을 '잡놈' 이라 칭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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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채 4학년이 되기 전이다. 2005년 12월에 연극 '이' 를 보러 갔다가 시사회로 우연찮게 영화를 보고, 그 뒤 개봉하고 나서 또 보고, 그리고 한 번 더 보고. 그러니까 세번쯤 본 뒤에 나온 글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 개인적으로 제법 우쭐해서 꽤나 진지하게 영화 평론가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지금 생각해도 글은 참 맘에 든다. 그런데 이 글이 이렇게 잘 나온 건 내가 평론에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리라. 세번, 네번 보고 또 본 영화여서, 보고 난 뒤 생각하고 또 생각할 정도로 좋아한 영화여서 글이 좋았던 거다.

그러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평론가는 못 될거다. 타인의 결과물을 너무나 순수한 마음으로 몇번씩이나 보고 또 보고 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열정이 내겐 없다는 것을 이젠 안다. 타인의 결과물에 자극을 받아 내 결과물을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단순한 감상만으로 그치는 것은 이제 못한다. 왜냐면 난 이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얼마나 재밌는지, 얼마나 내게 희열을 주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낸 것으로 인해 타인이 감동을 받는 게 훨씬 더 짜릿한 일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